선수로 산다, 때론 좋은 코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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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표백 - 장강명

godsman 2018. 3. 5. 07:00

[도서] 표백 - 장강명

작가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20대에게는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글감으로 삼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명문대학교 출신의 동아일보 기자가 청년세대 이야기를 글로 써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유로 오래 전부터 꼭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빌려 놓고도 한참을 읽지 않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을 이야기 하길래 더 늦기 전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끝이 궁금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다만 나는 당신들이 '자살 선언'의 대안으로 길거리에서 플래시몹을 하거나 서명운동을 벌이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거기에 글을 올리는 일 따위는 고려하지 않기를 바란다. 청년 연대니 청년 노조니 하는 단체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별 효과 없으리란 것이 뻔히 보이는 데 더해, 무엇보다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공격은 언제나 번개같이 빠르고, 위협적이어야 한다.

표백을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하는 문장입니다. 자살을 잘못된 선택으로 간주하고 대안으로 선택한 좋아보이는 많은 일들이 위협적이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계획은 너 자신을 위해서인 거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건 아니지?"

'자살 선언'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위한 것 같다고 의심하며 묻습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누군가에게 영웅도, 선지자도 끊임없이 혼자와 마주합니다. 결국은 남들이 나만큼 힘들기를 바라거나 누군가에게 상처주기 위해서 시작한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청년들에게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죠"라고 따질 때 떠올랐다.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나 '도전'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위대한 일'은 무엇일까요? 왜 도전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는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지?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있는 젊은이들이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책 제목이 표백인 이유입니다.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타고 세상에 났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났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성공했다고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올림픽에는 '위대한 일'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이 많고, 그런 일이 삶의 목표였던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선수들이 성숙해서 일까요? 올해는 특히 금은동의 색깔을 중요하게 여기는 풍조가 줄어들었습니다. 열심히 연습한 패배자들에게도 올림픽 참석이라는 더 넓은 목표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일본선수이면서 한국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고다이라 나오[각주:1] 선수는 말합니다. "메달은 영광이지만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가 더 중요하다. 메달은 내가 여태 싸워온 증거로 봐주셨으면 한다"

청년이었을 때는 목표를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 시기에는 목표가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관 형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몇 가지 기억나는 목표가 있습니다. '임대업자'가 되지 말아야겠다. 나이들어도 노동으로 벌어먹고 살아야겠다. 일단 시작하면 상위 몇프로 안에는 들어야겠다. 돈 때문에 회사를 옮겨다니지 않는다.  등등.

한 10년쯤 지나니 적당히 타협하게 되었고, 지금은 결국은 모두 '임대업자'가 꿈인 거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훌륭한 선수도, 개발자도 모두 한창 때 돈을 벌어 노후에는 편하게 사는 거, 그런 걸 꿈꾸는 건 아닌가.

회사를 다니면 노동으로 돈을 버는 회사는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임대업자'처럼 회사가 돈을 버는 사업과 직원이 하는 업무가 일치하지 않는 직장이 좋은 회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대우도 좋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하는 능력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적으니, 업무 태도 또한 관대합니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직장보다 직업이 중요한 시대라고 합니다. 살짝 돌려 생각하면 한 직장에 필요한 사람보다는 여러 직장에서 쓰일 수 있는 부품이 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안정적이거나 대우가 좋은 곳에 노예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러고 보면 표백세대는 청년에게먄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 고다이라 나오(2018 평창올림픽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금메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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